피터 틸, 블레이크 매스터스
Written on January 19, 2025
제로 투 원을 다시 펼쳤다. 불과 2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책을 읽고 얻어간 통찰은 전혀 달랐다. 아마도 이전과 내가 처한 상황, 그리고 그간 겪은 경험과 식견 때문이라고 짐작해본다. 기억 속의 제로 투 원은 회사의 경영과 창업자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에 대한 책이었는데, 조금 전 덮은 책에서는 전혀 다른 주제에서 깊은 통찰을 느꼈다. 그래서 이 글을 통해 생각을 정리하고, 나의 언어를 섞어 기록해두고자 한다.
피터 틸은 미래를 바라보는 관점을 두 가지 축으로 분류했다. 하나는 낙관과 비관, 다른 하나는 명확함과 불명확함이다. 이 분류는 단순해 보이지만, 현대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이들은 암울한 미래가 올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그게 빠르게 진행될지 느리게 진행될지 모른다. 이들이 하는 일이라곤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쇠퇴가 진행되기를 기다리는 것 뿐이다. 미래에 대한 희망 없이 현재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이들의 모습은 마치 로마 제국 말기의 귀족들을 연상시킨다.
어두운 미래가 올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므로, 이들은 항상 대비한다. 계급을 막론하고 미래를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이며, 뭐든 절약하고 비축하려고 든다. 이들의 행동은 때로는 과도해 보일 수 있지만, 적어도 미래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자신이 미래를 계획하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17세기부터 서양의 발전을 이끌어온 사람들은 바로 명확한 낙관주의자들이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1929년에 착공해 1931년에 만들어졌으며, 맨해튼 프로젝트는 1941년에 시작되어 1945년에 세계 최초의 핵폭탄을 제조했다. 나사의 아폴로 계획은 1961년부터 12년간 12명의 인간을 달에 착륙시켰다.
명확한 낙관주의자들은 어떤 계획이라도 심각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간파했던 것처럼 각 세대의 발명가들과 선지자들은 이전 세대의 발명가들과 선지자들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불명확한 낙관주의자들은 미래가 현재보다 나아지리라 생각하지만, 어떻게 더 좋아지는지 모른다. 따라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고, 세울 수도 없다. 기업들은 새로운 제품을 만들기보다 이미 고안되어 있는 제품을 재조합하며, 컨설턴트들은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대신 기존의 프로세스를 최적화하기를 권한다.
베이비붐 세대들은 이러한 불명확한 낙관주의의 세대이다. 이들은 자신의 노력과는 관계없이 세상이 나아졌기에 이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70년대 이후 기술의 진보가 더뎌졌을 때, 이들을 구원한 것은 소득 불평등의 심화였다. 기득권은 시간이 지날수록 부가 쌓여갔으며, 취약계층은 아무리 노력해도 기득권에 다가가기 어려워졌다.
돈이 목표가 아닌 수단이 되려면 미래가 명확해야 한다.
그러나 불명확한 낙관주의는 가능한 것일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좋은 미래를 바란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이런 무지성한 다윈주의는 현대를 지배하고 있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이러한 불명확한 낙관주의의 허상을 꿰뚫어 보았다. 그는 진화의 방향이 단순히 생존에 유리한 쪽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더 큰 힘에의 의지가 지배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우리가 막연히 '발전'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실제로는 더 강한 의지의 발현일 뿐, 반드시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AI 연구로 대표되는 현대의 과학계마저 이러한 맹목적 낙관주의에 편승하여 구체적인 계획을 바탕으로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 아닌, 무작정 가설을 시험하고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바라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스타트업계의 '린 스타트업' 방법론도 마찬가지다. MVP(최소기능제품)를 빠르게 만들어 시장에 내보임으로써 반응을 살피고 규모를 넓히는 이 접근법은 방법론일 뿐 목표가 될 수 없다. 피터 틸은 묻는다. 회사를 성공시킬 계획이 없으면서 왜 성공할 것이라 기대하는가? 우연에 기대지 않는 똑똑한 디자인이 필요하다.
사회 현상을 관찰하다 보면 흥미로운 패턴이 발견된다.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가 발견한 '파레토의 법칙'은 우리 사회의 불균형한 분포를 설명하는 강력한 통찰을 제공한다.
사실 대부분의 사회 현상은 정규 분포가 아닌 멱법칙(power law)에 의해 지배된다. 그럼에도 우리가 정규분포를 먼저 떠올리는 이유는 단순히 직관적이고 편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경제학의 '효율적 시장 가설'은 정규분포를 이용해 시장의 운동을 아주 편리하게 기술했다. 이런 단순화된 모델은 가르치기도 배우기도 쉽기 때문에 모든 경제학과의 학생은 '효율적 시장 가설'을 배우고 이를 이용해 시장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대학 생활을 보낸다. 이들이 사회에 나와 처음 배우는 일은 '효율적 시장 가설'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실제 시장의 움직임은 '효율적 시장 가설'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멱법칙의 특성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무분별한 다각화의 함정에 빠지지 말고, 자신만의 강점을 발견하고 여기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아라.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어진 자원을 무작정 다각화한다면, 우리는 하위 20%의 결과만을 낼 수 있을 것이다. 대신, 우리는 계란을 조심스럽게 한 바구니에 담아야 한다. 우리가 잘 아는 일, 좋아하는 일, 잘하는 바구니에 계란을 담아야 한다. 워런 버핏은 500조에 달하는 포트폴리오를 운용하지만, 역사적으로 상위 5개 기업이 전체 포트폴리오의 7~80%를 차지했다. 그는 투자를 야구에 비유한다. 야구는 스트라이크 세 개를 보내면 아웃되지만, 투자의 세계에서는 타자는 무한히 공을 지켜볼 수 있다. 그러다가 노림수에 공이 들어온다면 스윙하면 되는 것이다.
누군가는 똑같은 생각을 했겠지.
사람들과 멋진 아이디어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고 나면, 예외없이 나오는 말이다. 이 말이 튀어나오고 나면, 열띤 토론의 장은 온데간데 없고, 미지근한 분위기만 남아 아이디어를 비관적이고 볼품없게 만든다. 어느정도는 사실이다. 인터넷이 상용화되기 이전에는 지역간, 집단간 유의미한 지식의 격차가 존재했고 이 점이 멋진 아이디어로 승화되었다. 반면,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는 인터넷에 의해 정보의 격차는 유의미한 오차 범위 내로 좁혀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문제를 풀고자 스타트업의 세계로 뛰어든다.
그러나 한편에는, 사람들의 비아냥을 등에 업고 이런 세계로 뛰어드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피터 틸이 말한 '명확한 낙관주의자'들이다. 그들은 단순히 미래가 좋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아닌, 구체적인 계획과 비전을 가지고 있다. 이뤄지지 못할 꿈을 안고 사는 사람이, 현실에 타협한 염세주의자들보다 아름다운 것은 지극히 사실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가진 꿈이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며, 필요할 때마다 수정한다. 이들에게 '누군가는 똑같은 생각을 했겠지'라는 말은 오히려 동기부여가 된다. 그렇다면 왜 아직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는지, 무엇이 부족했는지를 분석하고 더 나은 해결책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어떤 미래를 꿈꾸는가? 더 나아가, 진정으로 미래를 그리고 있는가? 피터 틸의 '제로 투 원'은 스타트업 성공의 비결을 넘어, 미래를 마주하는 우리의 자세에 관한 통찰을 담고 있다.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여정은 창대한 계획에서 시작하여, 자신만의 통찰과 강점에 집중하는 용기로 이어진다. 우리는 모두 '제로'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하나'로 가는 길은 결코 우연이나 운에 맡길 수 없다. 명확한 비전을 세우고, 철저한 계획을 수립하며, 집중된 실행을 이어갈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에 도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