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니체
Written on March 2, 2025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인간은 어떤 조건에서 선과 악이란 가치판단을 고안해냈는가? 그리고 그러한 가치판단들 자체는 어떠한 가치를 갖고 있는가? 우리는 자연스럽게 '악한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하고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더군다나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보다 인류의 진보와 복지, 번영에 더 이바지한다는 통념은 의심의 대상조차 되지 않았다.
《선악의 저편》을 거쳐 《도덕의 계보》에 이르기까지, 나는 이러한 통념과 고정관념, 공리라 여겼던 모든 것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니체의 사상과 견해는 여지껏 불경하게 여겨져왔고 심지어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 책을 마무리하며 "약간의 진지함과 인내심을 가지고 이를 마주한다면, 이보다 즐거운 학문은 없으리라"라는 그의 말에 격한 동의를 느꼈다. 따라서 이 글을 통해 그의 논문을 정리하고 나의 말을 덧붙여 기록하고자 한다.
니체의 논리는 '언어는 개념을 매개하며, 의식적 사유는 말, 즉 의사 전달의 기호를 통해 발생한다'는 명제에서 시작한다. 니체는 한 가지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에 주목한다.
역사적으로 다양한 문명에서 '좋음'이라는 단어는 처음부터 필연적으로 '비이기적' 행위와 결부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는 '선한 사람'을 타인에게 잘 베풀고, 대가 없이 호의를 베풀며, 타인의 고통에 진심으로 공감하는 사람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선과 악'의 대립은 '이기적'과 '비이기적'의 대립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니체에 따르면, 이러한 의미는 '귀족적 가치판단의 몰락', 즉 '무리 본능'의 지배를 계기로 시작되었다.
니체는 도덕을 노예도덕과 주인도덕으로 구분한다. 《선악의 저편》의 원제 《gut und böse, gut und schlecht》가 암시하듯, 두 도덕은 근본적으로 다른 가치체계를 지닌다.
노예도덕에서 '선'은 타인에 대한 선행을 의미하지만, 주인도덕에서 '선'은 용기, 지혜 등의 탁월함을 의미한다. 노예도덕에서 선의 대립물은 타인에 대한 해악인 '악'을 의미하며, 주인도덕에서의 '나쁨'은 비겁함과 어리석음의 저열함을 의미한다. 노예도덕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동등한 존엄성을 지닌다고 본다. 니체는 출생 신분과 무관하게 모든 사람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가치관이, 사실은 나약하고 열등한 노예들이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위해 만들어낸 것이라고 보았다.
두 도덕은 행복을 이해하는 방식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주인도덕에서 '태생이 좋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행복한 자로 여겼다. 이들은 넘치는 힘과 능동적 활동을 행복의 본질로 보았으며, 행복과 행동의 불가분성을 인정했다. 반면 노예도덕은 외부세계를 부정하고 '원한'을 재해석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에게 행복은 마취 상태, 휴식, 평화와 같은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 9장에서 '고귀함'의 본질을 상세히 묘사한다. 고귀한 자는 가치를 창조하는 능력을 지니며, 깊은 존경심과 책임감을 가진다. 이들은 고상한 우정과 청결을 추구하고, 고독을 견디는 힘이 있으며, 자신의 특권을 의무로 이해한다. 또한 뛰어난 통찰력과 자기 외경심을 지닌다.
이와 대조적으로, 노예적 특성은 연민과 온정, 인내심과 근면성, 겸손과 친절로 나타난다. 이들은 자유와 행복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며, 타인의 평가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인다. 니체는 이를 '허영심'이라고 지칭하며, 고귀한 자들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덧붙였다.
니체는 노예도덕의 승리가 로마와 유대의 오랜 대립에서 유대가 승리한 결과라고 본다. 2천 년에 걸친 이 승리로 인해, 우리는 그 영향을 의식하기조차 어렵게 되었다. 니체는 이러한 승리가 인류를 병들게 한다고 보았다. 생명의 본질인 힘에의 의지가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되면서, 오늘날 만연한 허무주의와 무력함이 퍼져나갔다고 주장한다.
인류는 긴 역사를 거쳐 약속을 지킬 수 있는 동물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억이라는 능력이 발달했는데, 이는 단순한 망각의 제거가 아닌 잊지 않으려는 능동적 의욕, 즉 한번 의욕한 것을 지속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러한 능력의 발달로 인간은 책임이라는 개념을 갖게 되었다.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주권자로서의 인간은 자신만의 가치 척도로 타인을 평가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러한 특권에 대한 자부심과 지배적 본능을 우리는 양심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기억하게 되었는가? 선사시대부터 이어진 인류 심리학의 주요 명제가 이를 설명한다:
끊임없이 고통을 주는 것만이 기억에 남는다.
이에 따라 인류의 기억력이 부족할수록 형벌은 더욱 가혹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
주목할 만한 점은, "범죄자가 처벌받는 것은 그가 달리 행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상은 형벌 제도보다 훨씬 후대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형벌의 근원은 죄의식이 아닌 채권자와 채무자의 계약관계에 있었다.
고대 인류에게 잔인함은 일종의 축제였다. 그들은 타인의 고통을 구경하고 가하는 것을 순수한 즐거움으로 여겼다. 이러한 맥락에서 공동체와 구성원 간의 관계도 채무관계를 기반으로 했다. 공동체가 강해질수록 형법은 점차 완화되었고, 결국 채권자가 얼마나 피해를 감당할 수 있는지가 부유함의 척도가 되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제도의 발생 원인과 그 궁극적 효과는 별개라는 점이다. 형벌은 죄책감을 유발하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을 더욱 냉혹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행위가 '정당한' 명분으로 행해지는 것을 보며, 형벌은 오히려 죄책감의 발달을 저해했다.
양심의 가책은 국가 형성 과정에서 발생했다. 강한 종족이 약한 종족을 지배하면서 법률을 제정했고, 약자들은 자신의 본능을 내부로 향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세대 간의 부채 의식이 발생했다. 종족은 조상의 희생과 업적으로 존속한다는 확신과, 이를 되갚아야 한다는 의식이 생겼다. 이러한 의식은 종족이 강성해질수록 더욱 강화되었다.
이러한 부채 의식은 신에 대한 부채 의식으로 발전했고, 그리스도교의 신과 함께 절정에 도달했다. 그리스도교는 독특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신 스스로가 인간의 죄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이다. 이로 인해 인류는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게 되었고, 이것이 현대적 의미의 양심의 가책이 되었다.
금욕주의란 성욕이나 식욕 그리고 소유욕과 같은 본능적인 욕망을 죄악시하면서 이들의 충족을 금하는 정신적 태도를 의미한다. 금욕주의는 그 자체로 자기모순적이다. 금욕주의자들은 자기 자신의 전제인 생리적인 삶의 능력을 봉쇄하면 할수록 자기 자신에 대해 더욱더 확신하게 된다.
그러나 니체는 '삶에 반하는 삶'의 자기모순은 단지 외관상의 것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금욕주의적 이상이 퇴화하고 있는 삶의 방어본능에 의해, 삶을 보존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금욕주의에 병든 자들, 예컨대 삶에 실패한 자, 패배한 자, 좌절한 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병들게 한다. 이들은 그들 자신의 비참함을 행복한 자들의 양심 속으로 밀어 넣으며, 자신의 행복에 대한 권리를 의심하게 한다. 고통받고 있는 자들은 누구든 본능적으로 자신의 고통의 원인을 찾고자 한다. "내가 불쾌한 것에는 누군가의 책임이 있다."라고 추론하면서 그들의 불쾌함의 참된 원인은 더욱더 은폐된다.
금욕주의자들이 불쾌함과 고통을 없애는 수단으로 다음과 같은 방법들을 시도했다:
생명력의 최소화: 가능하면 의욕도 소망도 갖지 말 것.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말 것. 복수하지 말고, 부자도 되지 말며, 일하지 말 것. 이들은 최면 상태와 정적을 항상 최고의 상태, 즉 구원으로 간주했다. 이들은 고통의 부재를 최고의 선으로 여긴다.
기계적 활동: 지적인 최면 상태보다 더 흔하게 볼 수 있는 형태는 기계적 활동이다. 인간의 의식은 협소하기 때문에 반복되는 하나의 활동만이 의식에 들어오며 다른 고통이 들어설 여지가 거의 없게 된다.
선행: 우울증과 싸우는 좀 더 귀중한 수단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줌으로써 '작은 우월감'을 느끼는 것이다.
무리 형성: 집단의 힘을 자신의 힘과 동일시함으로써 불쾌감이나 자기 혐오를 넘어선다.
죄책감: 금욕주의적 성직자가 사용하는 주된 방법 중 하나는 죄책감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불쾌감을 자신이 지은 죄에서 찾으면서, 이를 벌로 인식하게 만든다. 이러한 접근은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교에서 등장한다. (예: 아담의 원죄, 전생의 죄)
그러나 이러한 치료체계는 모두 인간을 더 병들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대규모로든 소규모로든 개인과 집단 모두에 걸쳐 파괴적인 현상으로 이어진다. 중세의 무도병, 마녀사냥,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이르기까지 금욕주의 성직자적 치료법, 즉 자학적인 치료는 인류에게 파괴적인 영향을 끼쳤다.
니체는 질문을 던진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왜 저항을 받지 않았는가? 이들의 대립물은 무엇인가? 금욕주의적 이상은 오직 하나의 목표를 가진다. 이는 '오직 금욕주의적 이상이라는 유일한 해석 기준에 따라 거부하고 부정하며 긍정하고 시인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힘에 대해 자신이 절대적 우위를 갖고 있다고 믿는다. 지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힘도 금욕주의적 이상의 작업을 위한 도구, 길이자 수단으로 믿는다. 이와 같은 의지, 목표, 해석에 대립하는 것은 어디에 있는가?
일부는 과학이 금욕주의적 이상의 대립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니체는 과학은 금욕주의적 이상의 가장 새롭고 고귀한 형식이라고 반박한다. 오늘날의 과학은 가치 창조적이지 않다. 과학에서 엄밀한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서 이 학문 전체가 하나의 목표, 의지, 이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니체는 과학에 '힘에의 의지'가 결여되어 있다고 본다.
또한, 니체는 과학에 의해 신 자체를 부정하려는 시도로부터 금욕주의적 이상이 더욱 견고해졌다고 주장한다. 신학적 천문학이 패배함으로써 인간의 존재는 더욱 하찮고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인간의 왜소화로 인한 허무주의로부터 인간은 스스로 품었던 존경심을 잃어버렸고 낡은 이상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불신자들은 어떠한가? 무신론자, 반그리스도교인, 비도덕주의자, 무정부주의자인 이들은 지적인 결백성을 요구한다는 한 가지 점에서 무조건적이다. 그러나 니체는 이들 또한 금욕주의적 이상의 정신화된 산물이자, 가장 섬세한 형식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들이 진리를 믿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의 형이상학적 가치, 즉 진리의 가치 자체에 대한 신앙이고, 이러한 무조건적인 의지야말로 금욕주의적 이상 자체에 대한 신앙이라고 주장한다.
금욕주의적 이상을 제외하면 인간이라는 동물은 지금까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생존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없었던 것이다. 인간은 삶의 의미라는 문제로 괴로워했다. 인간은 하나의 병든 동물이었다. 그러나 인간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괴로워하는가?"라는 답이 결여되었다는 점이다.
고통의 의미나 목적이 밝혀져 있기만 하다면, 인간은 되려 고통을 바라고 고통을 찾기까지 한다. 고통 자체가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가 인류에게 내려진 저주였던 것이다. 그런데 금욕주의적 이상은 인간에게 하나의 의미를 준 것이다.
따라서 니체는 금욕주의적 이상이 "무를 향한 의지이고 삶에 대한 혐오이며 삶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들에 대한 반영"이라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이는 분명히 하나의 의지이다. 인간은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기보다는 차라리 무를 의욕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세 개의 논문을 독파하는데 6개월 이상의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각각의 논문을 여러 차례 읽으면서 논리적 흐름과 비유적 의미를 파악하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지만, '니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비교적 명확했다. 첫 번째 논문에서 니체는 '선과 악'의 기원을 탐구하며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의 대비를 통해 원한감정(ressentiment)이 어떻게 도덕을 형성하는지 보여준다. 두 번째 논문에서는 양심과 죄책감의 발달 과정을, 세 번째 논문에서는 금욕주의 이상의 의미와 영향을 파헤치고 있다.
니체 철학의 중요한 관점 중 하나는 고통에 대한 시각이다. 니체는 '고통'이 인간을 성장시킨다고 믿었다. 고통은 인간이 사유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며, 영혼을 성숙하게 한다고 해석했다. 반면, 고통을 회피하고자 하는 삶의 태도는 결과적으로 더 큰 고통과 나약함을 초래한다고 보았다.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는 건강한 정신과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중요한 관점은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시각이다. 오늘날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 심지어 집단에서 자신의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의 의지나 욕구를 포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니체의 견해는 이러한 상황을 더욱 입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게 한다. 그의 '힘에의 의지' 개념은 사회적 관계만을 무조건적으로 우선시할 필요가 없으며, 때로는 자신의 선택과 가치를 중요시해야 함을 일깨운다.
「도덕의 계보」를 통해 니체는 우리에게 도덕의 기원을 재고하고, 그 이면에 숨겨진 의지의 다름을 직시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러한 계보학적 접근은 니체가 비판했듯이 단순히 객관적인 시각에서 과거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가치 체계를 해체하고 재평가하기 위함이다. 오늘날 우리는 특히 선과 악, 죄책감, 자기 부정의 이상과 사로잡혀 있음과 동시에 이러한 자기 파괴적 행위의 결과물인 집단이기주의, 극단주의 등의 파괴적 행위가 일어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한 면에서 니체의 통찰은 이 시대에 특히 유효하다.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창조하고 긍정하는 '위버멘쉬(초인)'의 자세는 니체가 지적했듯이 현대 사회에서 역설적으로 더 어려워졌지만, 동시에 그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졌다. 결국 니체의 「도덕의 계보」는 단순한 철학적 탐구를 넘어, 진정한 자아 실현을 위한 필수적인 여정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