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 구운몽
광장
월북한 다음, 사회에서 쓰는 낯선 말에 익숙해지기까지, 한동안 괴로운 말의 헛갈림을 겪었지만, 이 교양 사업이라는 것도 그 한 가지였다. 그때까지 명준의 말버릇에서는, 교양이란 낱말은, 퍽 개인적인 겪음에 치우친 낱말로 돼 있었다. 그 교양이란 말에 이어붙인 사업이란 낱말은, 글라디올러스 화분에 붙잡아 맨 전기 모터처럼, 영 어색하게만 보였다. 그러나 같은 말을 여러 사람이 되풀이할 때, 거기 새 짜임새가 나오는 것이었다. 동무라는 부르기만 해도 그랬다. 누구에게나 들어맞을 부름말이 없었던 탓도 있었으리라. 변증법을 빌린다면, 양적인 발전이 질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현상이라고나 할까.
그런 생각이 문득 떠오른다. 방은 비어 있었다. 옛날 미라 관 뚜껑을 열었을 때 그 비어 있음이 거기에 있었다. 예전대로 보존된 방에 오래 머물지도 못하고 다음으로 찾은 곳이 정 선생 댁이었다. 거기도 비어 있었다. 낯익은 가정부는 굳은 낯으로 처음 보는 사람 대하듯 했다. 서울에 왔으나 명준에게 서울은 비어 있었다. 찾는 사람마다 모두 없다. 인천에까지 갈 시간을 마련할 수는 없었다. 윤애에게는 그렇게 빚만 남았다. 아마 찾아가도 없었을지 모른다. 찾아가지 못했다는 일도 있었더라면 좋을 일이 없었다는 빈자리로 남았다. 은혜가 모스크바로 간 때부터 그의 밀실은 모두 비어 있다. 그 빈방의 뿌리가 모두 정 선생네 미라 상자에서 나온 걸가지 같았다. 마치 몸통 안에 몸통이 있는 러시아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국토의 끝 남해 바다에 떠 있는 이 섬 거제도도 꼭 관 같았다. 포로라는 이름의 죽은 병사들. 그 거대한 관 속에 비웃 두름처럼 무더하게 드리누워 있는 포로들이 그 관이었다. 한 줄에 꿰인 드럼 속의 한 마리인 자기라는 원통. 그 관속에 관이 있고 그 또 관 속에 관이 있고 그것들의 가장 밑에 선생 댁 그 미라 관이 있고, 미라 관의 그 비어 있음의 안쪽에 또 다른 관이 있을 것 같다. 가장 깊은 관, 가장 안쪽의 관, 그 비어 있음의 주인공은 바로 나였구나. 이렇게 스산한 마지막 판에 도달하려고 나는 살아왔는가. 이 관에 누워 있는 나는 악몽이 아니다. 이것은 꿈이 아니다. 이것은 깰 수 없는 꿈이다. 이 꿈에서는 깨지 못한다. 이것은 현실이니까. 그러나 꿈을 회상하는 자기와 꿈을 꾸는 자기는 어떻게 다를 수 있는가? 꿈을 회상하자면 꿈속에 있어야 할 게 아닌가? 꿈속에 있지만 꿈을 꾸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남쪽 바다에 떠 있는 가시 울타리를 덮은 관 속에 누워서 이름 없는 서울 거리를 없는 사람들을 찾아 헤매던 자기를 그때마다 다시 산다. 회상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은 정말 그때 거기서 그들이 한 말인지 지금 회상하는 자기 기억이 만들어낸 말인지 이제 갈라볼 수 없다. 기억이 그렇게 기억하고 싶어서 그렇게 회상하고 있을 뿐인 기억의 꿈인지도 모르는 그런 회상을 붙들고 이명준은 남녘의 바다를 바라본다.
퍽이나 미미하지만 어룽어룽한 다름이 있다. 갑판의 나뭇결 빛깔이 얼마쯤씩 다른 탓인가 하고 살펴보는데, 잘 모르겠고, 그것은 아무튼 그 위에서 되비치는 빛의 꺾임은 고르지 못하다. 쭈그리고 앉아서 갑판에 손바닥을 댔다. 따뜻했다. 손을 움직여 쓸어보았다. 꺼끌꺼끌한 겉은 그 따뜻한 기운만큼은 정답지 못했으나, 손바닥을 맞아들이는 부피에는 닿음새만이 지니는 믿음성이 있었다. 자꾸 쓸어보았다. 지난날, 은혜의 몸을 이렇게 쓸어보았다. 이 햇빛에 익은 나무처럼 따듯하고, 그보다는 견줄 수 없이 미끄러운 물질이었다. 자기 손을 보았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더듬고, 무엇인가를 잡고있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외로운 놈이었다.
구운몽
수없이 많은 탐조등 불줄기가 초조하게 도시의 하늘을 헤매고 있다.
여기는 혁명군 방송입니다. 당신들은 왜 가만히 지켜만 봅니까? 당신들은 왜 방관합니까? 적은 반격에 나섰습니다. 압제자들은 반격을 개시하였습니다. 자유는 목 졸리려 합니다. 공화국은 교살당하려 합니다. 혁명은 위기에 빠졌습니다. 시민 여러분, 빨리 힘을 빌려주십시오. 혁명은 교살 직전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의무를 팽개치십니까? 저 미래의 아이들이 발을 구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당신들의 미래를 버리십니까? 당신들은 자유보다 노예를 고르십니까?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무기를 들고 거리로 나오십시오. 교만하던 자들의 목에 죽음의 목걸이를! 염치를 모르던 자들의 기름진 배에 다이너마이트를! 사랑을 모르던 자들의 심장에 죽음의 훈장을! 알고도 행하지 않은 자들의 머리통에 폭탄을 선사합시다. 혁명군은 곳곳에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싸움터로 달려가서 자유를 지키십시오. 사태는 긴박합니다. 압제와 부패와 학살이 우리에게 구애(求愛)하고 있습니다. 이 구애를 물리치십시오. 압제와 부패와 학살은 아직도 우리를 사랑한다 합니다. 그들은 강간으로 시작한 결혼 문서를 내밉니다. 이 불법 문서의 권위를 거부하십시오. 빨리. 빨리. 당신들은 무얼 하고 있습니까? 당신들은 우리를 죽이시렵니까? 연인이여 당신의 사랑을 밝히십시오. 그 찬란하던 별빛 아래 당신이 세운 사랑의 맹세를 증거할 땝니다. 배반합니까? 모른다 하십니까? 오 그럴 수 없습니다. 당신은 나의 영원한 사람. 나를 버리지 못합니다. 빨리 오십시오. 이 팔을 동여매주십시오. 바리케이드를 쌓아주십시오. 승리한 다음에 우리의 포옹이 태양보다 뜨겁기 위하여. (총소리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면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끊어진다. 또다시 총소리) 아아 마지막입니다. 압제자들은 이곳을 에워쌌습니다. 형제여 자매여 그리고 사랑하는 이여. 당신들의 배반을 용서합니다. 우리 가슴마다 하나씩 박혔던 보석을 뽑아 하나의 자그마한 도끼를 만들었습니다. 당신들과 우리 사이에 가로놓인 저 깊은 늪 속에 던져넣었습니다. 엎드려 그 깊은 갈라짐 속을 들여다봅니다. 그것은 나의 속으로 들어가는 입구. 사랑을 가지고도 이르지 못했던 깊이. 그 속에 어른거리는 당신의 얼굴을 봅니다. 당신의 희디흰 가슴을 봅니다. 그 가슴을 향하여 나는 도끼를 던집니다. 너에게로 던지는 나의 사랑. 너의 가슴을 부수고 저 흔들리는 별빛 아래 그대가 세운 맹세를 밖으로 내놓기 위하여. 나는 본다. 불사조처럼 날아오르는 그대의 양심을. 그대의 사랑을. 양심과 사랑에 거듭나서, 심연의 그 아득한 거리에 승리하고, 저 높은 자유를 향하여 날아오르는 그대의 앞날을 봅니다. 이 도끼를 받으십시오. (총성. 또 총성. 뒤따라 기관총의 이어쏴) 안녕히, 연인이여. 그래도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자유 만세. 공화국 만세.
이 감옥에 대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각하도 느끼셨겠지만, 안내인을 따라 견학하면서 저 이탈리아인 감옥 제도 연구가인 단테와, 그의 저서 『신곡』을 떠올리셨을 것입니다. 감옥 제도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로서는 그의 『신곡』이 효시라고 하겠는데, 그동안 감옥 자체의 성격이 본질적으로 달라져버렸습니다. 그 책 연옥편에 나오는 죄수들은, 대개 그 죄목이 신학상 및 윤리적인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그 사람들이 이 징역을 사는 이유는 신과 도덕에 어긋나는 일을 한 탓입니다. 따라서 그 감옥의 관리자는 신부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처벌 법규는 십계명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 율법에 반항하는 것, 이것이 단테 시대의 죄였던 것입니다. 이 시대 다음에 소위 형법 시대라는 것이 있습니다. 국가가 제정 공포한 형법에 저촉되는 행위는 다 죄다, 하는 사상입니다. 감옥이란, 이 죄인에 대한 응징이며 사회가 가하는 처벌이라는 거죠. 이 시대는 감옥사에 있어서 일개 타락의 시대였습니다. 감옥사조상으로는 암흑 시대였던 것입니다. 죄형법정주의라는 것입니다. 이 사상이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그 자체 죄악적이었느냐 하는 것은, 그사이 이름난 수감자들의 이름을 훑어보는 것으로써 넉넉합니다. 장발장. 간디. 안중근. 오스카 와일드. 이순신. 소크라테스. 플라톤. 성춘향. 그래 이사람들을 악당이라고 해서 곧이들을 사람이, 천하에 어디 있겠느냔 말입니다. 이 세기 초에 행형사상에 르네상스가 왔습니다. 오늘날의 감옥은 이 새 흐름에 따라 꾸려가고 있습니다. 오늘날에 있어서 죄란, ‘실미적인 조화를 가지지 못한 것’일 터입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 감옥을 부르기를 정신병원이라고 합니다. 또 복역수들을 환자라고 부릅니다. 좀 재치 있는 수작이 아닙니까? 옛날에 탈난 사람은 부락민들에게 뭇매를 맞아 죽지 않았습니까? 병이란 마귀와 결혼한 상태이며, 따라서 죄이지요. 이런 야만스런 제도는, 유체의 분야에서는 벌써 고쳐져서 병리학, 약리학, 임상학으로는 정연한 범죄 이론을 벌이고 병원 제도 및 자택 감금 제도로 이상화된 지 오랩니다만, 유독 정신 면에서만 늦어진 것은, 영혼이네 무엇이네 해서 정신 현상을 쉬쉬하면서 신비한 것으로 다루고자 애쓴 직업적 무당들의 간계 때문입니다. 본인이 기회 있을 대마다 내세우는 바입니다만 이제는 감옥의 관리권을 신부나 권력자에게서 우리 정신의들의 손으로 뺏어오자는 말입니다. 사실상 대세는 그런 쪽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만, 이런 개량주의적 점진 놀음으로는 공연히 과도기에 있는 세대만 골탕을 먹게 마련입니다. 현재 서울을 비롯한 몇 개 도시에, 우리 동지들에 의한 사설 감옥이 정신병원이란 명목으로 세워졌습니다만 이것은 감옥의 민영화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으며, 우편 일을 아직도 국가가 트렁쥐고 있는 나라로서는 신나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권력자란 어리석은 것이어서, 정신병원을 묵인하는 것이 자기들의 권력에 위협이 된다고까지는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모양입니다만, 하긴 중세기 끝판에 귀족들이 도시 장사치들에게 차용 증서를 서주면서 권력을 넘겨주고 있다고는 생각치 않았으니, 확실히 역사는 되풀이하는 모양이죠? 물론 제가 정신의라고 했을 때, 저는 넓은 뜻에서 이 말을 쓰는 것입니다. 작가, 시인, 철학자, 과학자를 두루 가리킨 것입니다. 각하, 한마디로 말슴드리겠습니다. 큰일을 꾸며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플라톤은 『공화국』에서, 마지막 정치 형태는 철학자에 의한 다스림이라고 까놓았습니다. 철학자를 정신의로 풀이해도 어긋나지 않을 것입니다. 각하. 민중은 폭정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결심해주십시오.
『아라비안 나이트』 속에 나오는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을 기억하시겠지요. 그 얘기 속에서 알리바바의 욕심쟁이 형이, 도적들에게 갈기갈기 찢겨 죽는데, 알리바바는 형의 시체를 찾아다 놓고 몹시 걱정하지만, 여종의 꾀로 탈 없이 장례를 치르게 됩니다. 즉 신기료장수를 데려다 시체를 꿰매 붙여서, 감쪽같이 사람들 눈을 속인 것입니다. 이 신기료장수는 해부사의 반대 작용을 한 것입니다. 조각을 이어붙여서 제 모습을 되살리는 것. 고고학이란 먼저 이렇게 알아두셔도 좋습니다.
죽음을 다루는 작업. 목숨의 궤적을 더듬는 작업. 그것이 고고학입니다. 우리들의 작업대 위에 놓이는 것은 시체가 아니면 시체의 조각입니다. 사면장. 박제사. 우리의 이름입니다. 박제한 호랑이는 아무리 그럴듯하더라도 영원히 단 한 치를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점으로 우리는 동상 취급합니다. 우리들의 작품을 가리켜 생명에 넘쳤다느니, 창조적이라느니, 허구의 진실이라느니 하고 칭찬할 때는 사실 낯간지럽습니다. 고고학자란 목숨이 아니라 죽음을, 창조가 아니라 발굴, 예언이 아니라 독해를 업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콜럼버스는 아메리카를 발명한 것이 아니라 발견했던 것입니다. 발명이란 것도 유의 순열조합 놀이에 불과합니다. 쉽게 말해서 고고학자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말이지요. 지구는 늘 신에 의해서 던져집니다. 요사이는 인간들도 이 흉내를 냅니다. 야구공을 던지는 대통령의 사진을 뉴스 필름에서 보셨지요. 화 있을진저. 옛날 모든 여인들은 그 처녀성을 신에게 바친 시대가 있었는데, 이 종교적 의식이 나타낸 기막힌 상징성을 좀 보십시오. 우리가 하는 일은 신의 행위의 결과인 처녀막의 열상을 검증하는 일입니다. 우리 자신의 성기를 들이미는 일이 아닙니다. 역사란, 신이, 시간과 공간에 접하여 일으킨 열상의 무한한 연속입니다. 상처가 아물면서 결절한 자리를 시대 혹은 지층이라고 부릅니다. 이 속에 신의 사생아들이 묻혀 있습니다. 신은 배게 할 뿐, 아이들의 양육을 한번도 맡는 일 없이 늘 내깔렸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이 지층 깊이 묻힌 신의 사생아들의 굳은 돌을 파내는 일입니다. 캐어낸 화석들은 기형아가 대부분입니다. 그것도 토막토막 난. 일반론과 용어 풀이는 이쯤으로 그치겠습니다.
근대 고고학에 대한 인식이 차츰 높아지고, 따라서 눈여겨보는 분이 늘어가는 일은, 이 밥에서 밥을 먹는 본인들로서는 솔직히 흐뭇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꽤 알려진 일이지만 한국의 유적은 그 황폐성과 뒤죽박죽으로서 이름이 있습니다. 폼페이를 파냈을 때, 그곳 전문가들도 놀랐다고 합니다. 그 너무나 말짱한 보존 상태 때문에. 이 같은 이상적인 유적을 다룰 수 있는 그쪽 학자들의 처지는, 우리로서는 부럽기 짝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유적은 제 꼴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것은 거의 전무합니다. 그뿐 아니라, 햇수 짚어내기에 결정적인 요소의 하나인 매몰 상태도 엉망입니다. 고석기 시대의 유물이 신생대에 파묻혀 있는가 하면, 그 바로 밑에는 아주 최근의 것과 닮은 기계붙이가 있는 형편입니다. 이것은 시대 가르기가 불가능한 경우인데, 난점은 한 시대의 유물 서로 사이에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화장실 자리에 고려자기가 놓여 있습니다. 어느 땐지 아직 밝히지 못하고 있으나, 불행한 우리 조상의 역사에 뒷간 기물까지 고려자기를 쓴 시대는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성경책 속에 피임 도구가 끼어 있는 화석이 나옵니다. 작전 서류 속에 연애편지가 섞여 있기도 합니다. 장군이 시장 앞에 서 있는 것은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알쏭달쏭입니다. 발굴된 저 ‘베제상’을 방불케 하는 남녀 포옹상이, 최근 우리나라에서 나왔는데, 한 팔로 남자의 목을 감고 입을 맞추고 있는 이 여인의 다른 손에는 비수가 들려 있고, 그 쇠붙이는 남자의 옆구리로 슬그머니 다가가는 몸매대로 굳어 있습니다. 이런 예를 들기로 치면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난처한 것은, 전혀 성질이 다른 조각으로 이루어진 일기의 인물 화석입니다. 즉, 머리는 신부. 얼굴은 배우. 가슴은 시인. 손은 기술자. 배는 자본가. 성기는 말의 그것. 발은 캥거루의 족부. 이 화석의 눈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웃지 마십시오. 아니, 웃으십시오. 눈알이 있을 자리에는 현미경 렌즈가 박혀 있었습니다. 이것은 누가 보나 희극입니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그렇게만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 이지러지고, 우습게 겹치고, 거꾸로 붙은 화석은, 고난에 찬 시대를 살아온 우리 선조들의 서글픈 자세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조상들의 역사는, 생남 기념으로 아버지가 심어준 나무가 아름드리 느티나무로 자란 뿌리 가에, 그 아들의 늙은 뼈가 묻히는 식의 역사도 아니었고, 한 도시의 아름다움을 보존하기 위하여 작전을 바꿨던 어떤 지휘의 그것처럼, 복 받은 역사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눈알 대신에 현미경 렌즈를 가진 이 상이 던지는 문제는, 그러나 이런 감상만이 아닙니다. 이 화석은 그 흉측한 모양에도 불구하고, 그런 대로의 통일감을 느끼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렌즈와 캥거루의 다리와의 결합이, 그냥 이질적인, 장소상의 접근이 아니고, 연속성을 가진 Gestalt로 보이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 다시 말하면 장미꽃과 돌멩이를 똑같이 올려놓는 손바닥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보신 영화는, 고고학 입문 시리즈 가운데 한 편으로, 최근에 파낸 어느 도시의 전모입니다. 이 도시는 분명히 상고 시대 어느 왕조의 서울로 짐작됩니다. 이 한 편을 특히 고른 것은 그것이 아주 최근의 발굴이라는 것뿐 아니라, 아까 말씀드린 한국 유적이 모두 그런 황폐성과 무질서성이, 아주 본보기로 나타나 있는 까닭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한국 고고학의 과제, 전망 및 골치를 한눈에 보여주고 있는 백미편이라 하겠습니다. 이 영화는 학적 결벽성이 강한 분에게는 사도로 비칠는지 모르나, 초보자를 위하여 어느 정도의 원형 복구가 되어 있습니다만, 말할 것도 없이 전혀 가설적인 맞춤입니다. 그런 탓으로, 언제든지 다시 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질이 좋은 수용성 풀로 가볍게 붙여놓았으며, 화학 처리, 원형 변경 등은 아예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학문적 엄격성과 학문의 대중화라는 서로 달아나는 명제를 잠정적으로 붙들어매느라 애썼습니다. 변명이 아닙니다만 이것은 과도기 속에서 삶을 받은 자의 슬픔이라 하겠습니다. 순수한 과학자치고 계몽에 손대기 좋아할 사람이 있겠습니까만, 이는 우리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보신 가운데 맞춤이 의아스러운 점이라든가, 다른 의견이 생각나시는 분은 본 학회에 알려주십시오. 아마추어의 순수한 아이디어는, 전문가들에게는 수천녀보다 더 귀중한 보배입니다. 이 영화는 피사체 자신의 성질 탓에, 그리고 말씀드린 만들게 된 뜻에 따라, 비교적 느린 걸음을 썼으며, 클로즈업을 쉴 새 없이 끼워넣었고, 같은 장면의 되풀이 및, 심지어는 영사기의 돌림을 멈추고, 중요한 화면을 정물 사진으로 볼 수 있게 다루었습니다.
다음에 이 필름의 이름은 ‘조선원인고’라 되어 있는데, 조선이라는 이름에는 아무 뜻도 없고, 우리나라의 옛 국호 가운데서 제비를 뽑아 골라진 기호에 지나지 않습니다. 연구가 다 끝나 그 연대가 다른 것으로 밝혀지더라도, 이 이름은 그대로 고유명사 취급을 하여, 바꾸어지지 않게 되기가 쉬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원인고라 하였는데, 그야 유물은 사람뿐 아니라 거의 한 도시 모두를 이룬 건물 및 그 밖의 것들로 이루어져 있으나, 우리가 미술관에서 풍경화 속을 거닐다가도, 끝내는 초상화부 앞에 와서 제일 오래 머물게 되는 예로 보아, 원경고보다는 원인고를 택한 것이며, 인물 이외의 유물들의 값을 낮게 매긴 때문은 아닙니다. 그 증거로서 이 캐낸 도시는 빙하기의 것인데, 그것이 몇 번째의 빙하기냐 하는 점은 모르지만, 혹한기의 도시였다는 점을 나타내고자 적잖게 애를 쓴 자취를 느끼실 것입니다. 필름에는, 미루어본 그때 실내 온도, 기온, 바람굴, 강설량 등의 날씨 조건, 냉대 미생물, 극광 현상, 각 유물이 지닌 방사능의 비례표 등등이 밝혀져 있는 것을 보셨지요. 이것으로 성탄절 기념 초대 시사회를 마칩니다. (쿨룩쿨룩) 따르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