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자살에 관한 논의가 터부시된다는 것은 내게 가장 흥미로운 현상 중 하나다. 왜냐하면 나는 자살만큼 이성이 첨예하게 드러나는 선택을 떠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행하는 대부분의 행동은 우발성과 불확실성을 포함한다. 반면 적어도 자살만은 그 결과가 분명하다. 그것은 자기 존재의 종결이다.

인간의 본능과 감정이 궁극적으로 자기보존을 위해 형성되었다고 가정한다면, 죽음에 대한 공포는 가장 근원적인 감정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스스로를 유한한 존재로 인식하는 이상, 인간은 본능적으로 삶을 지속하려 한다. 그렇기에 나는 자살을 단순한 충동이나 순간적 감정만으로 환원하는 설명이 오히려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문제는 자살이 그 자체로 어떤 의미를 가지냐는 것보다, 자살의 대안으로서 어떤 선택지가 존재하냐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선택의 가치는 결과의 절대적 가치보다, 선택지 간의 기회비용으로 결정되므로, 자살의 의미 또한 상대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카뮈가 자살을 ‘굳이 살 만한 가치가 없음을 고백하는 행위’라고 바라보았듯,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규정하려는 행위라는 점에서, 자살은 가장 극단적인 자기결정이며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자아실현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자살은 왜 금기시되는가?

흥미로운 점은, 인류의 모든 시대와 문화가 자살을 동일하게 바라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비참함 속에서 무의미하게 삶을 연장하는 것보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편이 더 품위 있다고 여겼다.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에서 할복은 명예를 지키기 위한 행위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순교 역시 자신의 신념을 위해 죽음을 받아들이는 행위를 고귀한 것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나는 자살에 대한 혐오가 학습의 결과일 것이라고 본다.

여기서 자살에 대한 금기와 죽음 자체로 인한 상실감은 구분될 필요가 있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 앞에서 인간이 강한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것은 매우 동물적인 본능에 가깝다. 이는 흔히 ‘죽음 현저성(Mortality Salience)‘이라고 불리는 개념으로 설명되는데, 쉽게 말해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유한함을 자각하게 되면서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현상을 의미한다.

반면 자살 자체를 무조건 비이성적이고 유약한 행위로 규정하는 태도는 보다 사회적으로 구성된 성격을 가진다.현대 사회는 자살을 논의의 대상이라기보다 제거되어야 할 오류처럼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그 과정에서 자살은 삶에 대한 복합적인 판단이나 실존적 고뇌의 결과가 아니라, 단순한 충동과 도피의 산물로 축소된다.

나는 바로 이 지점을 문제라고 인식한다.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을 금기시할수록, 인간은 스스로의 고통을 언어화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존재에 대한 최후의 자기결정인 자살이, 단순히 힘들고 고된 삶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이는 마치 아이가 다칠까 두려워 모든 위험을 제거하려는 부모와 같다. 위험 자체에 대해 이해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기르기보다, 위험에 대한 논의 자체를 금지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자살의 유약화’이며, 사회 전체에 퍼진 일종의 정신적 페스트이다.